연극을 시작하기 전 나의 취미는 탁구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를 향해 마구 욕을 퍼붓고 싶을 때 지체없이 탁구장으로 향했다. 탁구하다 보면 힘든 일도 그 누구를 향한 미움도 하얗게 부서졌다. 하얀 공이 초록색 무대 위에서 건너편 모서리를 정확하게 찍고 튕겨 나갈 때, 상대방이 붕 띄운 공을 스매싱할 때, 나는 짜릿한 전율로 십 년은 젊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재빠르게 넘긴 공을 상대방이 어쩔 줄 몰라 헛손질할 때의 짧은 환호와 더불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의 감촉은 기쁨과 동일어였다.그러나, 늘 환호만 있는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으로 유명한 화가. 하얀 캔버스에 검은 정사각형 하나가 달랑 그려져 있다. 모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무심코 내가 뱉은 말, "이 그림, 나도 그리겠다. 화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단 말인가?" 3초 보고 다른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상할 것이 없었다. 무미건조했다. "이게 뭐람."그러나, 이 그림은 지금 가격을 책정할 수 없는 엄청난 고가의 그림이다. 원인이 뭘까?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나오기 전, 그 당시 그림의 소재는 현실이었다. 그림을 보면 무
연극도 뒤풀이도 끝났다. 겨울이 저만치서 나를 끌어당긴다. 한겨울의 매서움이 나를 꽁꽁 묶어 붙잡는다. 어린 시절, 겨울은 신나는 계절이었다. 벙어리 장갑을 끼고 얼음이 꽝꽝 언 논에서 썰매를 탔다. 손발이 시러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에서 나온 뽀얀 입김이 얼굴을 덮쳐도 신났다.그 썰매 놀이는 배꼽 시계가 신호를 보내야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궁이에서 막 구워진 고구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껍질을 벗기면 노란 속살이 드러나고 동시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올랐다. 입에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후후 불며 입 안에서 이리
연극이 끝났다. 어떤 일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후련하고 기쁘다. 관객들이 많아 기쁨이 배가된다. 차려놓은 잔칫상에 손님이 북적거리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금상첨화로 그 손님들이 "맛있다"라며 입을 맞춘 듯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면 몸이 공중으로 둥둥 떠다닌다. 관객들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잔칫집 반찬이 입에 맞은 것 같다.연극이 끝난 후, 사회자가 배우들과 함께하는 포토타임을 준다고 하자 하나둘 줄을 선다. 배우의 존재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순간이 바로 포토타임이다. 줄 서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은 피곤함을 물리치는 100m
(지난 회에서 이어짐)관객들의 닭 울음소리와 푸드덕 날갯짓 흉내의 경합이 끝나자 해설자가 무대 위에 있는 닭들을 소개한다. 왕초 닭을 제일 먼저 소개한다. “여러분, 닭들은 날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는 분, 우리들의 왕초 닭입니다.”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자는 척 누워있던 나는 뒷짐을 지고 거만한 태도로 두 발짝 걸어 나가 손을 들어 턱을 앞으로 내민다.왕초 닭은 보스로서의 체면을 살리고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손만 들어서 절도있게 움직이며 인사를 대신한다. 관객들이 박수를 친다. 뒤이어 참모 1과 참모 2가 재빨리 등장하며 대사를 하자
(지난 호에서 이어짐)공연 첫날, 처음 가는 소풍처럼 설렜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처음 아버지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었을 때의 기분, 그 원피스를 사서 손에 쥐고 오면서 팔짝팔짝 뛰었다. 머리가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때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갔다.그날 원피스를 입고 기분이 좋아 빙글빙글 돌았다. 원피스 끝자락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춤을 추었다. 그때의 기분으로 오늘도 신나게 춤을 춰야지(연극이 춤으로 시작된다). 춤을 추고 나면 긴장도 풀리고 연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지!의상을 챙기고 머리에
(지난 회에서 이어짐)나는 날마다 혼자서 리허설을 했다. 대사도 맛깔나게 쳤다(순전히 내 잘난 멋에 사는 나의 해석임). 동작도 대사에 맞게 흉내 냈다.연기지도가 있는 날이면 지도 선생님께 연기지도를 받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잊어버리기 전에 내 입과 내 몸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반응하도록 노력했다. 남편과 딸이 신참 역할, 참모 역할, 개 역할 등 일인다역을 소화하고 난 닭들의 리더인 왕초 역할을 열심히 소화했다. 연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춤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추고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지 점검했다. 때때로 딸의 지적을 받을
(지난회 새(鳥) 공연에서 이어짐)‘새(鳥)’ 대본에 나오는 대사와 행동을 나름대로 익혀 공연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번에 공연하는 ‘새’는 무대 위에서 대사와 동작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연극이다. 생방송이다. 실수하면 똥 밟은 것 같이 찜찜하고 그 냄새가 종일 따라붙어서 어디론가 숨고 싶을 것 같았다. 마음 부담이 컸다.지난번에 찍은 영화는 심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연출자와 카메라 감독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었다.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죄송스럽긴 하지만 다시 “액션”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촬
모 문화재단에서 배우(남자·50대 중반)를 초청해 그분의 연기 인생에 대해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배우는 혼자 있을 때 ‘무생물이 되어보기’라는 주제로 몸 연기를 한다고 했다. 커피가 되어보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가 되어보기도 하고, 물이 되어보기도 한다고 했다.그 무생물에 색을 입히고 인격을 부여하는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아주 철학적이고 생소해서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커피가 되기 위해서 최대한 몸을 구부려 둥글게 하고 숨을 최대한 참아 얼굴을 붉게 만들어(색을 입히는 연습) 커피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를
(지난 회에서 이어짐)“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1%의 영감으로 천재가 만들어진다고?그러나, 나는 천재는 만들어지기보다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을 수도 있고 질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노래는 어떤가? 춤은 어떤가? 연기는 어떤가?영화배우나 탤런트가 연기를 잘할 때 우리는 신들린 연기, 또는 미친 듯한 연기라고 표현한다. 눈썹도 실룩실룩 움직
(지난 회에서 이어짐)몸동작을 가르치는 선생님께서 목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가 제자리에 가져오는 닭 동작을 보여 주고서 한 사람씩 따라 해보라고 하셨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흉내를 내보았다. 내 차례가 되자 목과 가슴을 동시에 내밀었다. 마치 날아가려고 준비하는 듯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설픈 동작이었다.나뿐만 아니라 연극 아카데미 회원 대부분 동작이 어설펐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작을 취할 때마다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았다. 그러나, 연습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조금씩 닭을 닮아갈 것이라고 우리
(지난 회에서 이어짐) ‘새’ 공연에 필요한 몸동작을 가르치기 위해 남자 선생님이 한 분 오셨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유명한 선생님이셨다. 걷는 연습부터 시작되었다. 몸을 똑바로 펴서 자연스럽게 걸어보라고 하셨다.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기본이 중요하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지도 강사가 힘 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힘을 쭉 빼고 물 위에 엎드려 있으면 몸이 물 위에 뜬다. 그것을 알면서도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동으로 몸에 힘이 가해진다. 몸이 뻣뻣해지면서 가슴이 점점 더 수영장 바닥과 가까워
나는『산국』공연 시 무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양반집 마님으로 살았다. 마님역을 소화하기 위해 회원들과 연습하던 그때, 그리고 연습한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쏟아내면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공연이 끝난 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산국’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라는 노래의 흥얼거림도 더 이상 감흥이 없고, 공연의 감동도 사라진 그 무렵 나는 내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허전함을 달리기 위해 대학로의 소극장을 찾아다니면서 연극을 봤다. 좁은 무대 위에서 신들린 듯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지난회에서 이어짐)드디어「산국」이 무대에 오른다. 리허설을 끝내고 난 뒤 지도 선생님께서 “연습한 그대로 하면 된다”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할 수 있지. 우리가 누구냐? 50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대배우에게 가르침을 받은 우리 아닌가?’ 공연 첫날, 우리는 지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새기면서 화이팅을 외쳤다.입장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자 당당하게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해설자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며 막이 올랐다. 연습을 많이 해서일까? 떨리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지난회에서 이어짐)「산국」연습 과정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감탄하게 했다. 리딩 목소리를 듣고 배역을 정한 지도 선생님의 안목에 감탄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가진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더 나아가 저 목소리가 어떤 변화 과정을 통해서 그 배역에 맞추어 나갈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맡고자 한 농부의 아낙역을 맡은 미선이(가명)는 완전히 그 역에 몰입되어 한 장면 한 장면을 정말 실감나게 표현했다. 양반집 마님인 나에게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찌나 야멸차게 욕을 퍼붓는지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대사를 읽는
「산국」극본을 받아 안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현관에 걸터앉아 극본부터 읽었다. 중간쯤 읽자 슬픔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픔의 감정이입은 왜 이렇게 잘 되는지···.아씨의 남편과 자식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은 사실로 드러나고, 아씨네 소작농 딸은 왜놈에게 겁간당하고···.1907년이 배경인「산국」은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의병 활동이 한창이었던 암울한 시기가 배경이다. 그러다 보니 기쁨은 보이지 않고 슬픔이 군데군데 터져 나온다. 단숨에 극본을
2021년 가을, 딸이 전화했다.모 문화재단에서 연극 아카데미 1기생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홈페이지를 열고 신청을 했다. 이때는 연극 커뮤니티 회원들과 같이 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어서 모든 신경세포가 영화에 쏠려 있던 때였다.영화 촬영은 10월 중순에 끝나는데 연극 아카데미와 겹치는 날이 며칠 있었다. 다행히 요일이 겹치지 않았다.연극 아카데미를 신청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나이가 환갑에 가까워지면서 두려운 게 나이였다. 이 나이에 뽑힐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젊었을 적 사진을 신청서에 붙이면
2021년 10월 17일, 영화 촬영에 필요한 소품과 의상을 챙겨 촬영 장소로 향했다. 소품도 의상 준비도 모두 배우의 몫이었다. 배우라니? 내가 나 스스로 배우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연출가 선생님께서 “배우”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나를 지목한 말이 아니라 옆자리 선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선배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내밀었다.OH! MY GOD.세상에 나를 “배우”라고 불러주다니.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밴에서 하이힐을 나란히 내밀며 내리는 내 모습이
2020년 겨울, 낭독극을 발표한 후 평가회를 가졌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같은 연출가 선생님을 모시고 연기지도를 받기로 했다. 연출가 선생님께서 이번엔 연극이 아닌 영화 촬영을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연극은 현장에서 진행되는 생방송과 다름없기에 연극 소품, 무대장치, 사소한 실수, 배우들의 미세한 눈 떨림까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촬영된 장면을 편집해서 상영하는 것이기에 그 과정을 볼 수 없다. 나는 영화가 어떻게 촬영되는지 실제로 경험해보고 싶었고 궁금했다.첫 시간에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무함’ 그것이었다. 두 번 출연에 단 다섯 줄의 대사로 존재감 약한 조연 역할이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공연이 끝나고 홀로 그 경사 급한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주저앉고만 싶었다. 고요와 함께 찾아온 허무함에 눈물이 흘렀다.며칠이 지났다.뒤풀이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망설이다가 뒤늦게 참석했다. '연극 교실' 지도 선생님께서 연극 커뮤니티를 조직해서 운영하면 좋겠다고 하셨고 회장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제일 늦게 참석한 사람이 총무를 하면 어떠냐고 묻기에 시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