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1985년 가을이지 싶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인 그해 10월에 황지우의 시집 가 민음사에서 나왔다. 그보다 2년 전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라는 시집 등을 포함해서, 황지우는 내가 연필로 밑줄을 쫙쫙 그어가면서 외울 정도로 시를 탐독하던 시인 중의 한 명이었다.최루탄과 지랄탄으로 하루해가 뜨고 지던 군사정권의 극성기였던 전두환 치하에서의 울분과 분노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황지우 류의 시를 열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뒤에 나온
지난 2018년에 과일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평생을 모은 자신들의 전 재산 400억원을 한 대학에 기부한 노부부의 이야기가 보도되며 화제가 된 적이 있다.전쟁 직전에 돈을 벌기 위해 월남했던 남편 김영석 선생은 6.25가 발발하면서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다. 그의 부인 양영애 여사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나이 23살에 남편 김영석 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 부부는 1960년대 초 서울 종로5가에서 리어카로 과일 노점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남편 김씨는 “평생 돈을 쓰고 살아본
‘환갑 진갑 다 지낸다’라는 속담이 있다. 장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제는 환갑잔치한다고 누굴 초청하면 ‘젊은 사람이 뭐 하는 거냐?’고 욕먹는 시대가 됐다. 명실공히 100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더욱 환갑, 진갑 따지는데 무신경해지는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요즘 젊은이들은 환갑, 진갑이나 육순, 칠순, 팔순을 어떻게 계산하는지 잘 모른다.육순(六旬), 칠순(七旬), 팔순(八旬)은 우리 나이로 60세, 70세, 80세를 말한다. 그런데 환갑(還甲)은 60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므로 만60세, 우리
첫사랑을 당신은 잊었나요마음만 설레 이던 지난날 그 사랑을첫사랑에 당신은 울었나요가슴만 메어지던 지난날 그 사랑에굳은 맹세 푸른 꿈은 사라지고아련한 추억에 조각들만 남았을 때쓸쓸한 길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마주서면무슨 말을 하나요 세월이 흐른 뒤에(장은숙, 당신의 첫사랑 1절)가수 장은숙이 부른 ‘당신의 첫사랑’(1978)은 특별한 비유나 상징도 없이 그냥 직설적으로 지난날 첫사랑을 회고하는 다소 단조로운 노래다. 하지만 누구나 경험한 적 있는 첫사랑을 잔잔한 멜로디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녹여내 대중의 호감을 샀던 걸로 기억한다.첫
아내가 내게 자주 요청하는 일이 있다. 병의 뚜껑을 열어 달라는 것이다. 비교적 큰 유리병을 닫고 있는 양철 뚜껑은 닫히면서 더욱 밀폐효과가 생기는 모양이다. 시일이 좀 지나서 뚜껑을 돌려보지만, 여간해서는 잘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악력(握力)이 상대적으로 아내보다 좀 더 센 내가 열게 된다.돌림마개로 되어 있는 병뚜껑을 여는 게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병의 아래쪽을 한 손으로 움켜 쥐어야 한다. 손바닥 전체가 병의 밑바닥을 감싸고 엄지를 포함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병을 바닥쪽 옆면을
미국 출장을 갔다가 귀국해서 2주 차 자가격리 중이다. 한국이나 미국 할 것 없이 지난 1월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올 1월에 출국할 때나 입국할 때에 인천공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인천공항 면세점도 문을 닫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입국할 때 검역 시간을 포함하여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40분 남짓 걸렸다.하지만 8월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루 코비드 19 확진자의 수가 2천 명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인천공항은 인산인해였다. 착륙 후 입국검사장을 들어서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
한낮의 땡볕은 말할 것도 없고, 오밤중에도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치는 염하(炎夏), 성하(盛夏)의 계절이다. 불볕더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적는다. 이럴 때는 샤워장에서 물을 흠뻑 뒤집어쓰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지 싶다.우리 조상들은 등물하거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물리쳤다. 특히 계곡물이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시원하게 피서를 즐기는 모습은 지금도 흔한 우리네 풍속이다. 일본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중국의 전통 산수화가들은 요즘도 발 씻는 그림을 자주 그리는 것으로 보아, 현대 중국인들에게도 이런 풍습이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지 좀 된 영화 중 ‘잭 라이언 : 코드네임 쉐도우’이란 작품이 있다. 캐네스 브래너 감독의 2014년 작품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잭 라이언은 CIA 비밀 요원이다. 그는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유능한 금융분석가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의 직속 상관 하퍼역은 케빈 코스트너가 맡았다. 문제는 그의 약혼녀 캐시(키이라 나이틀리 분)조차 사랑하는 남자 잭의 신분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러시아에서 전 세계 경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경제 테러 음모가 진행 중인 걸 알게 된 잭. 그는 직접 러시아로 건너가 음모의 주동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인 동남아시아처럼 변해가는 모양이다. 장마철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친년 달밤에 널뛰듯’ 무시로 물 폭탄이 쏟아진다. 그러다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일시적으로 급하고 강하게 퍼붓는 소나기가 천상 열대지방의 ‘스콜’이다.기온이 연일 30도를 오르내린다. 정녕 봄날은 간 것인가? 연전에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소재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백설희의 오리지널 버전에서부터 최백호, 장사익, 한영애, 조용필을 거쳐 최근 미스트롯 홍자,
얼마전 사석에서 가수 김상희씨를 만났다. 그녀는 1960년대 초 대학 재학 중에 가수로 데뷔해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를 부르는 현역가수다. 늘 순수한 소녀적 감성과 아울러 친근하게 다가오는 감미로운 목소리, 뛰어난 가창력은 그녀의 외길 가요 인생을 여전히 환히 밝히는 등불이다.일행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전우여 잘 자라’(1950)는 노래가 화제에 올랐다. 이 노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첫 소절을 노래 제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젊은 세대도 군 복무시절 익히 들어 알고
오래 전의 일이다. 친구 A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공기업 중의 하나인 P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점심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그 회사 중역 1명과 수행원들이 허겁지겁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수행원 중의 한사람의 행동이 가관이었다.그는 사람들이 올라가려고 예약한 버턴을 제맘대로 모두 취소하고, 자기들이 가려는 층수의 버턴만 새로 누르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중역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는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더라는 것이다.20여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파트 꼭대기층에
비가 내리는 아침 출근도 하기 전에 고향 친구 A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비가 내리면!”이라는 한 마디와 함께. 사진에는 노오란 양은(洋銀)으로 만든 작은 잔에 가득 담긴 막걸리가, 갓 부쳐져 나왔을 법한 먹음직한 파전 한 장과 함께 나무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사실 내 고향 경남 하동에서는 파전 대신에 부추전이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부추를 ‘정구지’라고 하고, 전(煎)은 ‘찌짐’이라고 한다. 찌짐은 지지미의 경상도 방언이다. 그러니까 ‘정구지 찌짐’이 바로 부추전이다. 많은 양의 파를 사용하여 두텁게 부
'네이팜탄 소녀'라고도 불리는 흑백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베트남전쟁의 비극을 담은 사진으로는 가장 유명한 사진이다. 네이팜탄이 터지자 대경실색하고 맨몸으로 길거리로 뛰쳐나온 어린 소녀의 모습이 베트남전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사진 한 장으로 AP통신 기자 닉 우트는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퓰리처상을 받았다.갑자기 이 사진을 왜 들고 나왔느냐고? 베트남전이 일어난 것이 지난 1955년 11월 1일의 일이다. 베트남전은 그 성격이 그리 간단치 않다. 베트남전은 내전(內戰)인 동시에 국제전이었다.남북한이 서로 동
몇 년전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1년 동안 한 적이 있었다. ‘심리학으로 보는 영화, 그리고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이 강의 때문에 KTX로 서울역과 신경주역을 오가게 되었다.덕분에 일주일 간격으로 조금씩 바뀌는 서울과 경주 사이의 차창 밖 풍광을 주간 드라마처럼 즐길 수 있었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신경주역에 도착한다. 신경주역 역사에서 경주 예술의 전당까지 시내버스로 혹은 택시로 이동하면서 보는 탁 트인 서라벌의 바깥 풍경도 참 좋았다.경주에 살고 있는 지인이 경주의 문화재와 풍경도 하나하나 소개해 줘 경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전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영화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운 흥행을 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영화 ‘미나리’의 운명은 그냥 매우 잘 만든 독립영화 중의 하나로 주목받는 정도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나리’는 미국 영화계의 호평을 받으면서 화제의 중심에 서있다. 외국에서의 호평이 한국에서의 흥행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이번에도 통했다. 그렇다고 ‘미나리’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영화가 왜
우리집 둘째인 딸이 이번에 대학을 졸업했다. 코로나가 뭔지, 시국이 시국인만큼 졸업식 자체가 없었다. 그냥 캠퍼스 한 곳에 포토존을 몇 군데 만들어 졸업생들과 그 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있도록 배려한 게 전부였다.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넓은 황량한 캠퍼스는 마스크를 쓴 졸업생들과 가족들만 군데군데 보일 뿐 을씨년스러웠다.내 딸은 나름은 취직이 제법 잘되는 이공계열의 전공인데다가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기 때문에 아직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주변의 지인들 중에는 코로나 블루로 우울한데다가 자식들 취업문제
미국을 다녀왔다가 자가격리 중이다. 비행기 안에서 마스크를 낀 채로 열 몇 시간을 견디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공항은 한적한데도 코로나 방역 문제로 입국 수속에만 한시간을 훌쩍 넘긴다. 운전석과 승객석 사이에 하얀 비닐장막을 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다음날 날이 새자마자 관할 구청에서 실시하는 코로나 진단검사를 받아야 했다. 비행기 탈 때부터 시작해서 24시간 이상 면도를 하지 못했다. 어차피 자차로 구청에서 마련한 자기격리 대상자를 위한 선별진료소로 가야하는데다가 마스크까지 착용한다는 걸 핑계삼아 면도를
지인 A씨는 1990년대 한국 H자동차의 중국 서부 총책임자였다. 가족들과 함께 임지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숙소는 호텔이었다. 쓰촨성의 수도 충칭시에 있는 한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개조한 방이었다. 그때만해도 지방은 치안이 불안하고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회사측에서도, 공안당국에서도 이런 방식을 권했다고 한다.어느 휴일 W씨가 가족들을 데리고 충칭시내 한 재래시장에 쇼핑을 하러 갔다. 당시에는 대형마켓이 없었기 때문에 식자재 등을 사려면 재래시장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한창 쇼핑을 하고 있는데, 갓 초등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외곽의 조용한 곳에 잠시 머물고 있다. 원래 이곳은 겨울에 비가 자주 내린다. 오늘 아내와 함께 이슬비 내리는 동네를 가볍게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 이정표 기둥 곳곳에 잃어버린 개를 찾는 광고지가 눈에 띈다. 사랑하는 반려견을 잃은 주인의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 마음이 짠하다. 문득 대학시절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스페인어과에 M교수가 있었다. 그는 당시 TV방송에 나와 유창한 발음으로 스페인어 회화를 강의하던 유명강사였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와 입담을 자랑하던 원조 엔터테이너
쥐띠 해가 저물고 소띠 해가 시작되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카드를 받았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카드 문구는 이랬다. “2020년 행복했쥐? 2021년 행복하소!” 반말로 시작해서 반존대말로 끝났지만 기분은 좋다. 십이간지 속의 동물 이름을 운율처럼 넣어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이들에게 적절하게 안부를 묻고 덕담을 해주는 센스가 돋보인다. 알다시피 우리 조상들은 해가 바뀌는 과정에서 갖는 마음가짐을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라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