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데이트 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흐릿하고 잔잔한 조명 아래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 함께 팝콘을 나눠 먹으며 알콩달콩 게임을 하는 것, 손잡고 산책, 지갑과 심장이 모두 떨리는 쇼핑과 맛집 찾아다니는 먹방도 있겠지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겠지만 제가 추천하는 코스는 미술관입니다. 가까운 곳에는 숲이 있고 노출 콘크리트 건물과 흐르는 물로 폭포를 떠올리도록 지어진 멋스러운 장소가 남원에 있더군요. 시립김병종미술관이예요. 사랑과 예술은 따라다니기 마련이죠? 사랑의 도시 남원에는 예술의 기운이
얼마 전 동생이 새로 이사한 집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열린 집들이 축하 파티에 모처럼 가족이 모두 모였어요. 신도시에 지은 신축 아파트라기에 집을 구경한다는 기대감도 컸습니다. 진입로부터 넓고 층고가 높은 주차 공간에 최신식 출입 시스템을 갖춘 단지더군요. 새집 구경에 마음이 부풀었습니다.제가 도착했을 때는 먼저 온 식구들이 집구경을 하고 있더군요. 흥분과 감탄의 소리가 들려오는 집안으로 서둘러 들어간 후 저 역시 곧바로 공간의 놀라운 아름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저는 집의 구조나 아파트에서 바라보이는 전망을 말하는
가끔씩 떠올려 본 의문이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왜 어렵다고들 할까? 흔하게, 자주 못들어서는 아닐까? 거창하게 무게 잡고,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동네 노래방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고전음악 카페가 있다면, 주변에 쉽게 갈 수 있는 클래식 연주회가 있다면 어쩌면 다르지 않을까요? 몇 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문화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겨울 궁전, 카잔 대성당과 같은 뛰어난 건축물을 둘러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르미타시 박물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려면 뭘 좀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어.”평생 클래식 연주회를 자발적으로 찾은 적이 없던 친구였는데 임윤찬 덕분에 뒤늦게 덕질을 시작했다며 털어놓은 고백이다. 우연히 노래 하나를 들었는데 가슴이 저미는 것 같고 그 가수가 임영웅이더라는 얘기는 어쩌면 놀랍지도 않은 스토리일 테지만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들으면 지루하고 졸렸다는 사람이 임윤찬 때문에 클래식에 빠졌다는 전개는 사실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2년 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아침부터 잘 때까지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
“손가락을 자른다고 될 일이야?”이웃 남자와 아내의 성애 사실을 알고 질투와 분노에 휘말린 남편은 도끼로 아내의 손가락을 자른다. 다시 남자를 만난다면 손가락 모두를 하나씩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제인 캄피온의 영화 에 나오는 장면이다. 불륜이라는 단어로만 정의하기 힘든, 존재를 바꾸는 운명적 사랑이란 과연 행운인가에 대하여 논하던 중에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나와 다른 말을 했더랬다.“손가락 하나 가지고 될 일이야?”손가락을 자른다고 막을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는 나와 그래봐야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불륜이라는 친구가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도 높은 청량함이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은 크리스털 하늘에 눈부신 순백으로 빛나는 만년설과 구름,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평원에 ‘청정 자연’이라는 표현은 너무 초라하다. 보는 자연의 세계보다 더 좋은 것은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다.미세먼지에 눈이 뻑뻑하고 숨쉬기 답답하던 한국을 벗어나 원시의 숲을 걷고, 별이 무겁게 쏟아지는 야생의 트램핑을 했는데도 왠지 아쉬웠다. 흔한 말로 ‘레포츠의 천국’이라는 뉴질랜드를 그냥 지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라도
뉴질랜드에는 3000m급 높은 산이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반가를 많이 배출했고 일상적 등산 애호가도 많지만 정상을 향한 등산과 구별하여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Tramping)으로 유명하다.케플러(Kepler) 트랙은 피오르드의 대표 경관을 보여주는 숲과 높은 산, 깊은 계곡을 모두 향유하며 걷는 루트이다. 뉴질랜드의 장거리 하이킹 트랙은 대부분 원주민이 금보다 귀하게 여겼던 녹옥, 그린스톤(Green stone)을 채취하던 루트이거나 초기 개척자들의 탐사 길을 따라 걷는 형태지만 케플러는 온전히 트래
“재희야, 넌 무슨 요일에 태어났어?”리지가 사원을 산책하는 중에 물었다. 리지처럼 영국인이었던 동료가 내게 오래전에 들려줬던 노래, 마더 구스의 요일 아이 노래를 기억해 내려 애쓰는데 리지가 웃으며 탑 앞에 일렬로 놓인 불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태국은 불교 국가답다. 수도인 방콕에서도 물론 그랬지만 치앙마이에서는 정말 한 블록을 지나기도 전에 사원이 나타난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쉽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편의점만큼이나 자주 왓(사원)을 볼 수 있었다.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치앙마이에서는 사원마다 들어가 보았다. 바쁘게
"하타 요가를 이끄는 메튜는 유독 인기가 많아. 일찍 와야 좋은 자리를 잡아."요가 수업에서 만나 친해진 리지가 언질을 줘서 일찍 도착했는데 시작 20분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매트를 깔고 있었다.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요가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코로나로 집콕을 할 때 홈 트레이닝을 해볼까 하고 유료 수업 앱을 구독했다가 등록 기간이 모두 지나버려 두툼하고 푹신한 요가 매트만 구석 자리에서 ‘언젠가’를 부르짖고 있었다. 뽀얗게 먼지를 쓰고 있던 매트를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김에 매일 아침 농부악 공원의 무료 요가 수업 맨 뒷줄에 자리
치앙마이 공항이 서울 강남의 고속버스 터미널보다 조금 크려나? 한국에서 여섯 시간을 남서쪽으로 날아간 후 도착해서 짐을 찾으니 밤 11시가 다 되었다. 태국의 우버, 그랩으로 택시를 불러 올드타운 숙소로 향했다. 세계 어디서든 스마트폰-앱 사용이 지원되는 편리를 누리며 150바트(1바트: 한국돈 37원)를 자동 결제하는 것으로 치앙마이 생활이 시작되었다.한국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 기준은 단순했다. 올드 타운에 머물며 어지간한 곳은 걸어 다닌다는 결심이었다. 말 그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살아보며 머무는 개념이라
경아가 그해 치앙마이에서 12월을 보내기로 한 것은 개념의 여행이 생기기도 전, 살아보기 여행이 유행이라서는 아니다. 첫 번째 이유는 유독 추위가 기세등등한 때였는데 고질적인 호흡기 질환에 따듯한 기온에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고 했고, 항공사 마일리지가 동남아 도시까지 다녀올 수 있는 정도로 남아 있었던데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 이름이라 선택했다고 했다.게다가 치앙마이에서 위생이나 치안에 문제가 없을 정도의 동네에서 사치스럽지도 궁핍하지도 않을 숙소에서 머물 수 있는 비용은 제주도 4박5일
저녁이 내려온 마을. 컴컴한 골목은 좁고 가파르다.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박치기왕’ 김일의 레슬링 경기 방송이 시작할 때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당시 아빠들은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100원짜리 하나를 손에 꽉 차게 쥔 아이는 허둥지둥 어두운 골목을 뛴다. 넘어져서 돈을 흘리고 잃어버린 아이는 빈손으로 돌아와 꿀밤을 맞았다.깨진 무릎에 ‘아까징끼’(빨간약·소독약)를 발라주고 우는 아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쌀집 어른, 큰마당 집 아줌마였다. 깨진 팔꿈치와 무릎이 아파서, 꿀밤을 맞은 것이 서러워서 울기도 했지만 김일 아저씨의
“오 마이 갓! 저게 누구야? 저 사람 혹시 한스······ 아냐?”몇 발짝 앞서가던 케이가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스페인 피스테라(Fisterra)에 도착한 때는 늦은 오후였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대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곳이다. 이름부터 끝(Fis) 땅(terra), 땅끝마을이다. 처음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드디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표식 0.00km 표식을 보고 뭉클했던 그 순간, 돌아선 케이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선 이는 한스, 분명 한스였다.그는 그런 사람이다. 한 번
'옛날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왜 옛날 할머니들은 그런 말을 했을까?TV도 오락도 없던 시절 옛날이야기의 화자는 할머니였다. 손자 손녀들이 이야기를 졸라대는 것이 성가셔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옛날얘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근거는 오리무중이다. 나는 옛날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남원이 더 마음에 들었을까? 남원에는 구석구석 옛날이야기, 그것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소복하다금오신화는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이다. 다섯 편 가운데 [만복사저포기] 의 배경은 남원이
매일 아침 해가 뜰 때, 매일 저녁 해가 질 시간에 맞춰서 울룰루를 마주했다. 울룰루 주변, 불꽃처럼 빨간 흙을 맨발로 밟으면 내가 지구의 중심에 닿는다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며칠 동안 울룰루를 흠뻑 만나고 난 후 애버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또 다른 성지, 카타추타를 찾았다. 울룰루에서 북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애버리진 말로 ‘많은 머리’를 뜻하는 카타추타가 있다. 울룰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한 개의 거대한 바위산인 반면 카타추타는 크고 작은 36개의 암석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둥근 바위산이 거대한 존재의
울루루를 맞이하는 첫 번째 방식은 해맞이와 함께여야 한다. 새벽 4시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울루루에서 해맞이를 보려는 사람들 사이에 서둘러 합류했다. 버스는 암흑의 검은 공간 속을 헤엄치듯 지났다. 별이 쏟아지는 검은 하늘을 뒤로한 거대한 바위의 윤곽이 보였다.얼마나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렸을까.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와 어둠을 말아 올리며 서서히 거대한 바위가 해를 들어올렸다. 연보라, 분홍빛 물결이 먼저 생기고 노르스름한 빛이 떠올라 바위를 밝힌다. 고요한 힘으로 떠오르는 해를 비추는 바위산을 바라보며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비행기 창으로 보는 풍경은 끝없이 황량한 사막이다.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4시간을 날아가면 겨우 호주의 중심부에 닿는다. 호주는 하나의 섬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대륙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영화를 하나 보고 조금 졸다가 착륙 안내 방송을 들었다. 붉고 마른 땅이 펼쳐진 가운데 난데없이 우뚝 솟아오른 한 덩어리의 바위산이 보였다. 울룰루(Ulruru), 지구의 배꼽이다.울룰루를 향한 나의 ‘언젠가’ 소망은 20년 전 시작되었다. 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발단이었다. 백혈병이 걸려 죽어가는 소녀
뉴질랜드는 지구에서 하루를 제일 먼저 시작하는 나라다. 인생 리셋 트레킹을 결정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게다가 영화에서 반지원정대가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난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주 딱이다.지구에 보호해야 할 환경이 어디 여기뿐이겠냐만 밀포드는 세계 인류 유산으로 지정된 청정자연 보존지역이다. 캠핑은 아예 불가능하다. 중간 퇴로가 없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트랙 내 오두막의 최대 수용인원 40명에 들어야 한다. 여행사를 통해 럭셔리 롯지를 이용하는 50명을 포함해도 하루 최대 90
인생도 리셋이 될까?무언가 잘못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세상이 정한 방향을 따라 더는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길은 보이지 않던 그 무렵, 뉴질랜드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뒤틀고 끙끙거린 지 오래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병증을 끝내야 할 타이밍이었다.“사람한테도 리셋 키가 필요해!”“컴퓨터는 키 몇 개만 누르면 되잖아. 새로고침, 초기화, 프로그램 복원 뭐 이런 거 말이야.”“사람이 하느님보다 자비심이 넘치는 것 같아. 컴퓨터를 창조하면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줬으니까.”
도시의 첫인상은 답답하고 우울했다. 여행자로 찾아 만난 도시가 아니라서 그랬을까? 부담스러운 출장으로 처음 도쿄에 갔던 날은 하필 비도 좀 내렸다. 하네다 공항에서 신주쿠까지 가는 길에 차가 어찌나 많고 밀리는지 서울에서 어지간한 차량 정체에 단련이 된 나도 기가 질렸다. 버스 차창 너머 빽빽하게 이어져 있던 자동차 행렬, 미동도 없이 정지화면 같은 도로를 바라보며 일종의 폐소공포증을 느꼈다.그날 도쿄 거리에서 경적 하나 없이 질서정연한 갑갑함을 느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대도시의 혼잡과 외로움, 답답한 단절은 뉴욕,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