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학 동기와 선배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얼마 전 명예퇴직을 했다. 우연히 안부를 나누다 소식을 들었고, 말 나온 김에 모처럼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해서 가진 자리였다. 50대의 명예퇴직이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대학 졸업 이후부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당장은 달라진 하루하루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나 역시 24년간 다녔던 첫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를 돌이켜보면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정비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겠다고 마음먹고, 관심을 가졌던 분야 중 앞으로 오랜 시간 즐겁게 몰두하고 싶은 일을 시도하는 것도
딸아이의 책상 앞 벽에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본격 수험생 모드로 들어서서인지 매일 ‘피곤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가 어쩐 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적어 놓았는지 의아해하며 천천히 읽어 봤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환한 봄 햇살 꽃 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소매 잡는 이
부지불식간에 봄이 와 버렸다. 열흘 전만 해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지금은 바야흐로 봄이다(지난 주말은 초여름 느낌까지 들었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색할 만큼 봄과 가을이 조용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이상기온에 관해 논의해 보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나무에 색이 오르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지금을 놓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산책’의 계절이 됐으니 말이다.날이 따뜻해지니 몸을 움직이고 싶어지나보다. 3월 들어 ‘만나서 좀 걷자’는 연락을 많이 받는
50대가 되면 더 자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아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조금 더 성장한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각자 하는 일이 있고 생활 반경이 달라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봄이 가기 전에 한번 보자’, ‘시간 될 때 만나서 같이 가보자’는 식으로 애매한 약속만 나눌 뿐이다.그나마 SNS에 친구들이 모여 있는 대화방이 있어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기도 하고 축하할 일이 생기면 이모티콘을 남기며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래도 직장생활과 육아
오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 수요일에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라, 이후 치료 관련해서 혹시라도 다른 병원에 가게 되면 필요한 소견서도 써 주신다고.” 지난 6일에 응급실로 들어왔으니 병원에 들어온 지 3주가 됐다. 아버지가 갑자기 중심을 못 잡으시고 자꾸 넘어지신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게 지난달 이맘때였으니, 온 가족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리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고민해 온 시간이 한 달이 넘은 셈이다.처음에는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 친정 근처 대학병원 신경과를 찾아갔고 응급실로 내려가 뇌 CT
80년대에 10대를 보냈다면 좋아하는 팝스타가 한두 명은 있을 것이다. 라디오 청취가 지금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빈 시간을 채워주었던 때였고, ‘황인용의 영팝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 팝 전문 프로그램도 채널별로 방송되어 팝송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때였다.90년대 힙합과 아이돌이 본격 등장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이 확장된 이후에는 국내 가요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지만, 내가 학창 시절이었던 그때에는 라디오 방송뿐 아니라 ‘월간팝송’, ‘음악세계’, ‘핫뮤직’ 등 팝 음악
“엄마는 참 자존감이 높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딸아이가 핀잔하듯 가끔 나에게 던지는 말이다.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도 화장 좀 하고 다니지, 옷도 좀 신경 써서 입고.” 아마 친구 엄마들과 다르게 캐주얼한 옷차림에 민낯을 즐기는 내가 마뜩잖았던 것 같다.“엄마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은 건데. 화장은 필요할 때만 하면 되지. 난 화장 안 한 얼굴을 더 좋아해.” 어떤 때는 누군가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기도 한다. “정말 예쁘지, 다 가진 것 같지 않아?”, “응 예쁘네, 그래도 난 우리 딸이 더 매력적인데.”, “또
친구의 초대로 영화 시사회에 다녀왔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여성이 직접 보이스피싱 조직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인데, 워낙 요즘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많은데다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들어 관람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영화다. ‘보이스피싱 두목 잡은 주부’로 알려진 김성자 씨의 실제 사건은 2016년 방송에서도 소개되었다. 세 아이의 엄마인 김씨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보이스피싱으로 3200만원을 사기당한다.세탁과 옷 수선을 하며 열심히 모은 돈을 한 번에 잃은 그녀는 충격과 절망에 빠졌고,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 자신
#1.2023년을 뒤로하고 2024년 푸른 용의 해를 맞았다. 매년 이맘때는 휴대폰에 저장된 가족과 지인들의 번호를 확인하며, 통화나 문자로 한 해 동안 수고 많았고 새해에도 원하는 일을 이루길 바란다는 덕담을 나눈다.마침 올해는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네가 들어와 전화로만 건네는 인사가 아닌 함께 모여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조카를 데리고 홍대 앞에 가서 쇼핑을 했고, 셀프 사진관을 예약해 부모님과 함께 여러 포즈를 취하며 즐거운 포토타임을 가졌다. 큰아버님들 식구까지 합류한 십수명의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이렇게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딸과 함께 2박3일 일본에 다녀왔다. 아이의 기말고사 이후로 일정을 잡은 이번 일본행은 이전 가족여행과는 조금 다른 목적의 여행이었다. 12월 6~8일 도쿄 빅사이트(Tokyo Big Sight)에서 열린 ‘SDGs Week EXPO 2023’에 방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에코 프로’라고도 불리는 이 행사는 올해로 25회째 개최되는 일본의 환경 관련 종합 전시회로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위한 기술, 제품, 서비스, CSR 활동 및 각종 환
과감한 스모키 화장에 화이트 롱 드레스를 입고 당당한 포즈로 무대에 선 박진영 때문에 청룡 영화상 비디오 클립을 몇 번 돌려봤는지 모른다.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달콤한 꿈들은 이렇게 만들어져요), Who Am I to Disagree(누가 그걸 부정하겠어요)” 유리스믹스의 애니 레녹스가 오렌지 컬러의 짧은 머리와 짙은 립스틱, 각진 양복의 모습으로 이 노래를 부른 것처럼 박진영의 모습 역시 자유롭고 전위적이었다.춤사위가 특별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비닐 바지로 시작한 가수 박진영이
이 주 전쯤 정은혜 작가의 전시 '해의 시선' 개막식에 참석했다. 혜화동 로터리 근처 정감 있는 한옥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였는데, 그간 선보였던 주요 작품들을 ‘은혜씨가 사랑하는 작업들’이란 이름으로 모아 놓았다.군산 골목의 풍경부터 엄마와 할머니, 친한 이모들 등 작가를 아껴주는 가족과 지인의 얼굴, 가장 친한 친구인 반려견 지로, 자기 모습을 그린 자화상까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시기별로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발달장애 작가인 그녀는 작년 드라마 에서 한지민의 언니 영희 역으로 출연한
월요일이다. 출근 후 자리에 앉아 부서 공유 구글 캘린더를 열어 본다. 부서원들의 주요 일정도 확인하고, 미처 다이어리에 옮겨 놓지 못한 내 일정도 체크한다. 일주일 치 회의와 면담, 외근 등 굵직한 스케줄을 정리하고 나면 그다음은 점심시간이다.혹시 외부 인사들과 점심 약속을 잡아 놓은 게 있는지, 회사 직원들과 함께하기로 한 점심 모임이 있는지 살핀 후 비어 있는 점심 날짜가 며칠 남았는지 머릿속에 담아 둔다. 약속된 식사는 3일 정도가 좋다. 날씨와 몸의 컨디션에 따라 뭘 할지는 달라지지만, 나머지 2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자전거를 사라. 살아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한 에세이에 적은 문장이다. 톰 소여,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여행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즐겼던 것 같다. 48세에 자전거를 타보겠다고 결심한 것을 보면 말이다.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론을 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상점으로 가서 ‘새살이 솔솔’ 연고 한 통과 자전거 한 대를 탔다’(자전거 길들이기, 책쥬인)로 시작하는 그의 에세이에는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가 핸들을 움직여 제대로 탈 수 있게 되기까지 10여
한 달 사이 우연히 세 가지 새로운 춤을 경험했다. 리듬과 음률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몸이 가진 기세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동작으로 구현하는 춤에 대한 관심은 워낙에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적극적으로 따라 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우선 부서 사업 중 하나로 개최했던 ‘2023 KF 공공외교 랩소디’의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인도 전통무용 오디시(Odissi)와 서아프리카댄스 워크숍에 참여했다. 오디시는 인도 동북부 오리사 지역의 힌두 사원에서 2000여년 전부터 추어 왔던 전통 인도 무용으로, 신화 속 신의 모습을 손동작과 표정으로 구현하
요즘 들어 자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몇몇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미안해지기도 한다. 도움이 필요할 때(필요해 보일 때) 얼마나 기꺼이 시간을 냈는지 마음을 주었는지 돌이켜보기도 하는데, 많이 모자랐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게 된다.어떻게 지내는지 먼저 물어볼걸, 조금 더 걱정하고 내 일처럼 움직일걸, 가끔은 일없이도 만나 농담이라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낼 걸 등 후회되는 지점들이 꼬리를 문다. 기대고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그 어떤 것보다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걸 나이가 들수록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
만나이 통일법이 도입된 이후 지난 몇 달 동안 익숙했던 나이에서 한 살을 덜어낸 숫자를 말하고 있는데, 솔직히 아직은 몸에 잘 맞지 않은 느낌이다. 오십여 년 간 머리 속에 담아 두었던 나이를 갑자기 내려 말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나이와 몸의 상태, 삶의 모습을 나이테처럼 연결하며 살아왔는데 그걸 조정해야 한다는 게 무언가를 다시 그려야 하는 숙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살 젊어진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라, 새로운 나이를 머리에 담아두고 생활하려고 한다. ‘이제야 본격 오십 대에 들어선 거야’라고 되뇌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마음속 생각이 입 밖으로 툭 나왔다. 다들 올레길을 이래서 걷는구나 싶었다. 매체에서 일을 할 때 제주올레를 소개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고, 그럴 때마다 한 코스 한 코스 머릿속에 그려보며 꼭 내려와 걸어보리라 다짐했지만 기회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회사 일과 가족의 일상을 뒤로 하고 오롯이 걷기 위해 며칠 시간을 낸다는 게 말이다. 올레길뿐 아니라 서울 둘레길, 동해의 해파랑길과 서해의 서파랑길, 그리고 언젠가는 산티아고까지! 마음 속에 담아둔 걷고 싶은 길들은 가득했지만 늘 위시리스트에 그치
레전드 댄스 가수들이 전국 투어를 한다. 이효리를 중심으로 김완선, 엄정화, 보아, 화사까지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그녀들이 ‘유랑단’이란 이름으로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하고, 그 내용이 방송화된다는 걸 알았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20대에서 50대까지 세대는 다르지만 춤, 노래, 가수라는 직업 안에서 소통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스토리에 대한 예측과 이전에 좋아했던 그녀들의 곡을 다시 라이브로 들어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 물론 김태호 PD가 연출했던 ‘싹쓰리’, ‘환불원정대’에 이어지는 이효리가 등장했던 이전 방송들과
“양성이 나왔네요. 여기 계시면 처방전 가져다드릴께요.” 간호사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래요?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는데…” “지금부터는 다른 분들과 격리해 주시는 게 좋아요. 집에 가셔서도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한 번도 안 걸렸고 남편과 아이가 확진됐을 때도 괜찮았는데, 지금 코로나19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긴 그동안은 방역 수칙을 착실하게 따르며 생활했다. 어딜 가든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손 소독은 필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