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준의 마이골프레시피 30회]
벤 호건 "골프서 가장 중요한 샷은 다음 샷"
영미가 40여년 장악해온 세계 100대 코스
아시아 곳곳서도 수준 높은 코스 탄생해야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다음 샷’이라는 명언을 남긴 미국 프로골퍼 벤 호건 /사진제공=오상준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다음 샷’이라는 명언을 남긴 미국 프로골퍼 벤 호건 /사진제공=오상준

골프를 통해 보여지는 나의 그림자 이후

깊은 우물 속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서 2년을 버텼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전염병이 속수무책으로 퍼지는 난리가 난 걸 보면서도,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중국 해남도의 골프장 답사를 위해 예약한 항공편이 강제로 취소됐을 때 알았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KF94 마스크를 구하러 다녔고 약국에서 마스크 배급을 받아야 했고, 약삭빠른 이들은 이걸로 돈을 벌었다.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당신은 잘 살고 있는가?

마스크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고, 피부가 거칠어지도록 자주 손을 씻는 습관이 생겼고, 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손세정제를 집, 자동차, 사무실 등 눈에 띄는 곳마다 비치했다. 숫자에 상관없는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고, 전에 없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꺼려지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국가 보건당국에 의해 관리된 삶의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졌고, 가는 곳마다 QR코드를 찍고 체온을 재는 것은 더 이상 귀찮은 일로 치부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비일상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까지 우물 속 캄캄한 공간에서 2년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 속에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갇혀 있는 동안, 개인과 집단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골프는 만병통치약?

심신이 지쳤을 때 ‘힐링’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날 이해하고 걱정해 주는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친밀한 교류이고, 둘째는 신선한 공기와 풍경으로 가득한 자연에서 경험하는 유유자적한 시간이다. 골프는 이 두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매력이자 장점이 있다.

골프는 일상이 되어 버린 ‘비일상’ 시국에서 유일하게 숨통을 틔워주는 만남의 기회였고 골프장은 타 스포츠나 사교의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이 월등히 보장된 ‘건강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100년 전 스코틀랜드의 알리스터 맥켄지 박사가 환자들에게 ‘골프를 치면 아픈 일이 없을 것’이라며 내린 골프 처방전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절이었다. 방역방침에 의해 샤워를 못하고 욕탕에 못 들어가는 상황에도 큰 불평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적어도 코스에서는 코로나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마치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안정감마저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2021년 한해동안 골프는 대한민국에서 유래없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사이판, 발리, 몰디브에서 인스타그램과 틱톡에 여행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던 2030 세대들이 국내 골프장의 페어웨이와 티잉 그라운드에서 자신을 플렉스하기 시작했다.

과거 골프장엔 없었던 화려하고 감각적인 힙스터 패션이 아재들의 미스매치 패션코드를 더 촌스럽게 만드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도 생겼다. 골프가 기득권층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골프 대중화 시대가 훌쩍 와 버린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시간의 유한함에 극도로 예민해진 코로나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를 담보로 미래를 사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불만족스러운 일상을 견뎌낼 인내심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로또를 사 놓고 1등 당첨 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듯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이지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위에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이 지난한 어두운 터널의 끝은 언제쯤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버킷리스트 포스터
버킷리스트 포스터

버킷 리스트

2008년 개봉한 잭 니콜슨 주연의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에는 초로(初老)의 남자 두 명이 평생 간직해 온 꿈을 하나하나 이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정비사 ‘카터’(모건 프리먼)는 억만장자 ‘잭’(잭 니콜슨)을 만나 그동안 종이 위에 끄적거려 오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둘의 유일한 공통점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가’라는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다.  평소 즐겼어야 했던 일상의 즐거움, 좀 더 많이 나눴어야 했던 가족과의 소소한 시간들,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했어야 했던 감사의 표현, 사랑하는 이에게 전했어야 했던 진솔한 감정 등 그 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후회하는 시간은 얄궂게도 생의 끝단에 찾아온다.

타이밍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회고의 시간이 괴롭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즉시 행동에 옮겨야 한다.

골프장에서 하지 말아야 할 표현은, ‘Could have been, should have been, would have been.’ 이라 했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해야만 했었어, 그랬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뜻이다. 이런 후회의 말들은 모두 과거에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그 대상이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다음 샷’이라는 벤 호건의 명언처럼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실수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서 후회 없는 미래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버킷 리스트에 나온 ‘카터’의 대사 중 하나가 마음에 꽂힌다.

“One day your life will flash before your eyes. Make sure it’s worth watching.”(미래의 어느 날, 네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거야. 그게 봐줄 만한 값어치가 있게끔 최선을 다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2021년은 꼭 가봐야 할 대한민국 골프장을 제대로 순례한 한 해였다.  총 52개소를 방문했고 그 중 과거 최고 명문으로 회자되어 온 코스들을 심층분석한 기회도 있었다.  그러면서 주위로부터 얻은 교훈은 코스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대한 평가와 같아서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세워서 평가하는 행위는 꾸준히 필요하다.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다양한 의견의 비교, 비판, 수용을 통한 ‘담론(Discourse)’이 골프장 설계와 비평 분야에서도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2022년은 여전히 코로나19의 변수가 있겠지만, 필자가 2년 전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에 뽑혔을 때 부탁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아시아의 골프장들, 특히 새롭게 개장한 코스들과 미 발굴된 코스들을 답사하고 평가하는 일이 그것인데, 아직 가보지 못한 국가들도 포함되어 있어 무척 기대가 된다.

과거 40여년간 영미권(英美圈) 문화를 중심으로 선정되어 온 세계 100대 코스 랭킹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아시아 지역으로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골프 종주국의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 높은 코스들이 아시아 곳곳에 탄생해야 한다.

2021년만큼 사람의 소중함을 강하게 느꼈던 해도 없었던 것 같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건 나의 의지와 용기도 중요하지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와 멀리서 응원해 주는 갤러리와 같은 소중한 타인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고, 코로나19의 종말이 오건 위드코로나가 됐건 간에 우리는 과거 인류가 온갖 역경을 견뎌내고 승리했듯이 다시 한번 현재의 역경을 극복해 낼 것이다.

믿음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힘든 시기일수록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은 자칫 암암리에 우리를 좀 먹어 들어갈 수 있는 편협(偏狹)과 냉소(冷笑)를 극복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건 골프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부디 해피 뉴이어!

오상준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대표

한국인 최초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에서 골프코스 설계 부문 석사 및 컬럼비아대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송도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 조성공사 등에 참여했다.

2015 프레지던츠컵과 더CJ컵 국제대회 운영을 담당했으며, 미국 GOLF매거진 세계100대코스 선정위원, 싱가폴 아시아골프산업연맹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골프에세이 '골프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을 출간했고, 유튜브 '마이 골프 레시피'와 강연 등을 통해 다양한 골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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