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지자체 운영 골프장 높은 인기
조선 왕실선 어보 도난에도 골프 삼매경
스코틀랜드 왕국 45년 금지령까지 내려
골프인들의 덕목은···'정직' '배려' '감사'

뉴욕에서 건축사무소를 다니던 30대 초반 시절, 숨막히는 도시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건 골프였다.

‘뮤니(Muni: Municipal Golf Course의 줄임말)’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퍼블릭 골프장으로 주말에도 4~5만원 정도만 내면 18홀 골프 라운드를 할 수 있었다.

시설의 수준은 거품을 최대한 걷어 낸 탓에 제대로 된 탈의실이나 샤워 시설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맨해튼을 벗어나 강 건너 뉴저지 주에 가면 훌륭한 자연 환경 속에 자리잡은 코스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서민 스포츠

신문연재 만화 ‘블론디에 나온 골프 에피소드. 만화는 일기 예보에 비가온다고 했는데 남편은 그래도 골프장가서 밥이라도 먹고 오겠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신문연재 만화 ‘블론디에 나온 골프 에피소드. 만화는 일기 예보에 비가온다고 했는데 남편은 그래도 골프장가서 밥이라도 먹고 오겠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남자 : 앱에선 오후에 비가 올 확률이 70% 라는데
여자 : 자기야 참 안타깝네
남자 : 왜?
여자 : 70%라는 말은 거의 비가 온다는 거잖아.
남자 : 아마도, 그러나 19번 홀 샌드위치 바는 아닐거야.

자동차 트렁크에서 골프화를 꺼내 신고 수동카트 위에 골프백을 실으면 준비 완료.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처음 본 이들과 짝을 이루어 코스로 나가곤 했는데, 미국 생활 중 참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났던 경험이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한 덕에 얻은 휴일, 황금 같은 평일 골프를 칠 수 있는 기회였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나왔다는 처음 보는 백인 중년남자와 한 팀이 되어 한적한 필드로 나갔다. 고질적인 슬라이스로 코스의 오른쪽만을 계속 걸어 다니던 그가 전반 9홀을 어렵사리 끝낸 후 내게 싱긋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A bad day of golf beats a good day at work’라고.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골프의 즐거움을 기막히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 문구인데, 우리말로 옮겨보면, ‘평일 날 골프 치러 나와 아무리 헤매더라도 사무실에 앉아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보다 훨씬 더 즐겁다’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미국의 여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골프는 미국인들이 국민 만화라고 부르는 4컷짜리 신문연재 만화 ‘블론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모 일간지에도 나오는 이 만화에서 주인공 블론디의 남편, 대그우드 범스테드는 골프광이다.

주말이면 소파에 누워 잠만 자려는 대그우드는 골프라면 벌떡 일어나 친구들의 부름에 달려나간다. 미국 중산층의 삶을 보여주는 만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골프 중독증.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골프의 인기는 한번 빠지면 벋어 나기 힘든 마력을 지녔다.

골프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역사는 반복된다.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는 공통적인 요인들이 있다. 골프도 예외는 아니다. 그 치명적인 중독성 덕에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회복하기 힘든 곤경에 빠진 이들도 동서양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골프가 골칫거리가 된 사례는 종주국인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골프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 양국 모두 본업을 저버리고 골프에 몰입한 ‘골프의 폐해’에 기인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골프 금지령을 내린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2세.
골프 금지령을 내린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2세.

1457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신규법령은 다름아닌 ‘골프금지령’이었다. 골프가 15세기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최초의 문헌인 이 법령에서 국왕 제임스 2세(1430~1460)는 활쏘기 훈련을 게을리하고 골프에 빠져 있던 병사들을 징계하기 위한 골프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 45년간 금지령은 계속되었다.

1896년에 그려진 영국의 풍속화는 기독교의 안식일인 일요일에 골프를 치다가 발각된 장면을 묘사했다. 교회에 가는 대신 링크스에서 몰래 골프를 치고 있던 이들을 발견한 순간이 재미있다.  성직자는 노여움이 가득한 눈을 치켜 뜨고 있고, 그 옆의 조수는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퍼팅에 집중하고 있는 동반자의 어깨 너머로 성직자를 발견한 골퍼는 못된 짓을 하다가 부모에게 들켰을 때의 표정이다.

1896년 영국의 풍속화 '안식일을 어긴 골퍼들' /출처 'The Sabbath Breakers', by J C Dollman (1896)
1896년 영국의 풍속화 '안식일을 어긴 골퍼들' /출처 'The Sabbath Breakers', by J C Dollman (1896)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한반도에서도 있었다. 때는 1924년 4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기사는 왕실 어보의 도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어보’란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이다. 이는 금전적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소중히 다뤄져야 하는 것인데 이를 도둑맞았다는 것은 당시 일제 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관리해야 할 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의 예식 과장이었던 이항구(을사오적 이완용의 차남)는 도난당한 어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효창원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 발견되어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의 변론은 듣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가 “종묘의 어보는 <중략> 돈으로 쳐도 몇 푼어치 안되는 것인데 그만한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 한단 말이요?“라고 했다니, 만약 같은 사건이 제임스 2세 치하에서 일어났었다면 죄인은 당장 참수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조선왕실 어보 도난사건이 기록된 1924년 4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기사(오른쪽)와 덕종의 어보(御寶).
조선왕실 어보 도난사건이 기록된 1924년 4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기사(오른쪽)와 덕종의 어보(御寶).

신세계를 개척한 골프광들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 교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 전문가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훈련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적어도 한 분야에 1만 시간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숙련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인데,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한가지에 몰입할 경우 10년, 10시간일 경우 3년이 걸리는 오랜 시간이다.

이 개념은 골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골프를 막 시작한 아마추어 골퍼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소위 싱글(영어로는 한자리 수 핸디캡이라는 의미의 ‘싱글 디짓 핸디캐퍼’라는 표현이 맞다)이 되기 위해서도 비슷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골프역사의 초창기에도 단기간에 프로골퍼가 되어 큰 명성을 얻은 인물이 있었다.

조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 선수가 1956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골프월드컵에 출전해 스윙을 하고 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조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 선수가 1956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골프월드컵에 출전해 스윙을 하고 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조선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1916-2004)은 열 네 살 되던 해에 그가 태어난 뚝섬에 위치한 군자리 골프장의 캐디로 취직했다.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곧 널리 알려졌고, 그는 골프를 시작한지 4년만에 경성골프클럽의 후원으로 일본 골프유학을 떠났다.

골프채를 처음 잡은 후 4년간 그가 골프연습에 몰두했던 시간은 과연 얼마였을까? 조선인 최초로 일본 프로자격을 따낸 그는 1941년, 일본 오픈 도전 여섯 번 만에 우승하게 된다.  그 후로도 그는1963년 프로골프회를 창립해 현재의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의 기틀을 다졌고, 후진 양성과 코스 설계업으로 골프와의 인연을 계속했다.

한국 골프사를 논할 때 꼭 등장하는 장면은 1998년 7월, 미국 위스콘신 주 코흘러 리조트의 블랙 울프 런 골프코스에서 만들어졌다. 골프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세계 최고의 골퍼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미 LPGA에 진출했고 그 첫 해에 메이저 대회 2관왕에 오른 박세리 선수.

박세리 선수가 세운 기록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나, 그 당시 TV중계를 통해 방영된 모습 중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한 장면이 있다. 해저드 턱에 걸린 공을 쳐 내기 위해 양말을 벋고 맨발로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만천하에 드러난 그녀의 하얀 발. 새카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되는 그녀의 하얀 발은 ‘1만 시간’이 훌쩍 넘었을 인고의 세월을 대변하는 증거였다.

1998년 7월 미국 LPGA 2관왕에 오른 박세리 선수의 새카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되는 하얀 발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1998년 7월 미국 LPGA 2관왕에 오른 박세리 선수의 새카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되는 하얀 발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골프가 욕먹는 이유 vs 골프가 사랑받는 방법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의 공통적인 가르침에는 ‘평화’가 존재한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종교 공통의 진리인데, 세상이 아직도 탐욕과 폭력으로 가득한 이유는 보편적인 ‘종교의 교리’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마치 한국의 골프가 이런저런 이유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유가 ‘골프의 속성’ 때문이 아닌, 일부 골퍼들의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 때문인 것과 같다.

골프는 스스로 룰과 에티켓을 지켜야 하는 스포츠이다.  골프 대중화를 먼저 실천한 영국,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골프 선진국에서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골프를 배우고 또래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면서 이웃과 함께 사는 지혜를 골프를 통해 배운다.

뉴욕 주 빈민가에서 미 프로골프협회의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골프를 배우고 있는 어느 소녀에게 ‘골프가 왜 좋으냐?’라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골프를 배운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이 소녀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골프가 좋다.  왜냐하면 골프에서는 내 자신이 선수이자 코치이자 심판이기 때문이다.’

모든 골퍼들이 가슴에 담아두고 평생 되새김질해야 할 진리가 소녀의 이 한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나 자신에게 정직할 것, 동반자를 배려할 것, 지금 골프를 칠 수 있음에 감사할 것.

골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덕목이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선택권이 풍부한 골프 선진국이 되기 전까지는 골프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골프가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일부 왜곡된 시각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골프의 공급자인 골프산업과 수요자인 골퍼들의 의식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도 골프의 사회적, 환경적 책임에 대한 골프 선진국의 정책과 실천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이번 주엔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 호야(La Jolla)에서 남자 프로골프 4대 메이저 대회의 하나인 US 오픈이 열린다.  이 대회의 격전지가 될 토리 파인즈(Torrey Pines) 골프코스는 최고명문의 회원제 골프장이 아닌 ‘뮤니’이다. 미국 골프의 다양성이 다시금 부러운 한 주가 될 것 같다.

오상준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대표

한국인 최초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에서 골프코스 설계 부문 석사 및 컬럼비아대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송도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 조성공사 등에 참여했다.

2015 프레지던츠컵과 더CJ컵 국제대회 운영을 담당했으며, 미국 GOLF매거진 세계100대코스 선정위원, 싱가폴 아시아골프산업연맹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골프에세이 '골프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을 출간했고, 유튜브 '마이 골프 레시피'와 강연 등을 통해 다양한 골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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